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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말할 수 있어야 생명 지킬 수 있어요”···예일대 정신과 교수의 조언
라이프호프, 자살 유가족과 함께 하는 전국 순회 포럼 15일 부산서 개최
나종호 교수 “자살 예방 위해 우리 사회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나종호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가 15일 부산 수영구의 복합문화공간 엘레브에서 진행된 자살 유가족 인식 개선을 위한 지역 순회 포럼에서 강연하고 있다.
“어둠을 나눌 수 있어야 빛을 발견합니다. 슬픔을 말할 수 있어야 생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나종호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
미국 코네티컷주에서 하늘길 15시간을 날아 온 정신의학과 전문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을 겪은 이들을 안아주듯 이렇게 말했다. 나종호 교수는 15일 부산 수영구의 복합문화공간 엘레브에서 진행된 자살 유가족 인식 개선을 위한 지역 순회 포럼의 강연자로 나섰다. 지난해 7월 같은 행사에서 유가족들 앞에 선 지 1년 만이다.
순회 포럼은 생명문화 라이프호프(대표 조성돈 교수)와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이사장 황태연), 자살 유가족 전국모임 ‘미고사(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가 유가족들의 일상 회복, 사회적 편견 속에서 겪는 고통 경감을 위해 지난해부터 ‘자살, 말할 수 있는 죽음’을 주제로 마련한 시간이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기(자살 유족들을 위한 대화)’를 주제로 강단에 오른 나 교수는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할 만큼 가까운 관계를 잃었을 때 더 강렬한 애도 반응이 나타난다”며 “애도 반응이 현실의 인정, 관계의 변화, 긍정적 미래에 대한 청사진으로 이어질 때 극복으로의 길을 낸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레지던트 시절 친구를 자살로 떠나보내야 했던 경험을 공유하며 유가족으로서 ‘내가 그의 자살을 왜 막지 못했을까’라고 스스로 자책하지 말기를 당부했다. 이어 “다른 유가족과의 대화, 긍정적 감정을 얻을 수 있는 이벤트 참여, 종교적 모임 등이 애도 후 회복을 돕는 좋은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라이프호프를 중심으로 자살 유가족과 함께 하는 공개 모임은 꾸준히 늘고 있다. 지난해 3차례 진행됐던 순회 포럼은 올해는 서울 수도권을 비롯해 대전 전주 부산까지 5차례 진행된다. 나 교수는 유가족을 위한, 유가족에 의한 모임들이 계속 이어지는 것의 의미에 대해 우리 사회의 자살률 감축은 물론 건강성 회복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유가족들이 자기 아픔을 드러내며 사람들과 소통하는 모습은 개인에게나 사회에게나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함께 걷기(community walk) 밤샘 걷기(overnight walk) 등 미국 자살예방재단(ASFP)이 펼쳐 온 ‘아웃 오브 더 다크니스(out of the darkness)’ 캠페인을 언급했다.
미국 자살예방재단(ASFP) 홈페이지 캡처
“밤새 걷기의 경우엔 참가자들이 어두워질 때부터 걷기 시작해 동이 트는 걸 함께 봅니다. 어둠 속에 있던 이들이 양지로 나아올 수 있도록 돕지요. 주요도시에서만 하던 것이 작은 도시들로 이어지고 있고, 과거엔 당사자와 전문가가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자신의 마음을 나누고 싶은 시민들 누구나 자연스럽게 참여하는 행사로 확장됐습니다.”
스테디셀러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아몬드)의 저자이기도 한 나 교수는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일상 속 ‘생명 지킴이’로서의 역할 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사실 ‘사람 도서관’을 구현한 분은 가장 낮은 곳에서 사랑을 흘려 보내주신 예수님”이라며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이 비단 자살 유가족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과 함께 울어주고 아픔을 나눠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전했다. 나 교수는 강연에 이어 자살 유가족들과 함께 하는 토크 콘서트에도 참여하며 자신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치유와 회복의 길로 용기 있게 나서는 이들을 응원했다.
국내에선 자살예방법 시행령을 통해 지난 12일부터 지자체, 초중고등학교, 사회복지시설 등을 대상으로 연 1회 자살 예방 교육이 의무화됐지만 벌써부터 실효성에 대한 의문 제기되고 있다. 교육 ‘의무 실시’ 기관이었던 사업장이 시행 직전 ‘노력 실시’ 기관으로 변경됐고, 결국 1670만여명이었던 의무 교육 대상자가 780만여명으로 반토막이 났다. 온라인 교육이 허용됨에 따라 실질적 교육 효과 감소 우려도 제기된다.
실제로 자살 예방을 위한 우리 정부의 지원은 여전히 부족한 수준이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지난 1월 발간한 ‘2024년도 예산안 심의 결과’에서 자살예방 관련 사업으로 확정된 예산은 총 603억여원이다. 이는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이 2021년 일본의 자살예방 관련 예산으로 추산한 8300억원의 7.3%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나종호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가 김혜민 자살예방협회 홍보위원장과 함께 자살 유가족의 애도 과정과 인식 개선을 위해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나 교수는 “과거 교통사고 예방을 위해 집행한 예산과 비교해도 자살예방을 위한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며 “한국 사회가 자살과 유가족에 대한 구조적 낙인을 떨쳐 내고 생명을 지키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강연 후에는 미고사 운영진과 자살 유가족들이 무대에 올라 유가족들이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겪고 있는 어려움과 유가족 지원에 대한 법률 제정, 자살 유가족 지원센터 설립의 필요성에 대한 현실적인 목소리를 냈다. 현장에서는 자살 유가족 지원에 대한 법률 제정과 지원 시스템 확보를 위한 서명운동도 진행됐다.
조성돈 대표는 “2년여 전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을 때 자살 유가족들이 ‘직접 나서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으면 좋겠다’고 용기를 내주셔서 순회 포럼을 시작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이어 “지난 20년간 자살률을 40% 가까이 줄인 일본도 그 시작은 유가족을 중심으로 한 국민 청원이었던 만큼 앞으로의 서명 운동이 자살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제도화와 함께 한국 사회의 자살을 줄이는 데 기여해나가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라이프호프는 오는 20일 서울 연세대 대우관에서 나 교수와 함께 다섯 번째 순회 포럼을 개최할 예정이다.
부산=글·사진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https://m.kmib.co.kr/view.asp?arcid=0020309599
“슬픔 말할 수 있어야 생명 지킬 수 있어요”···예일대 정신과 교수의 조언
라이프호프, 자살 유가족과 함께 하는 전국 순회 포럼 15일 부산서 개최
나종호 교수 “자살 예방 위해 우리 사회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나종호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가 15일 부산 수영구의 복합문화공간 엘레브에서 진행된 자살 유가족 인식 개선을 위한 지역 순회 포럼에서 강연하고 있다.
“어둠을 나눌 수 있어야 빛을 발견합니다. 슬픔을 말할 수 있어야 생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나종호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
미국 코네티컷주에서 하늘길 15시간을 날아 온 정신의학과 전문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을 겪은 이들을 안아주듯 이렇게 말했다. 나종호 교수는 15일 부산 수영구의 복합문화공간 엘레브에서 진행된 자살 유가족 인식 개선을 위한 지역 순회 포럼의 강연자로 나섰다. 지난해 7월 같은 행사에서 유가족들 앞에 선 지 1년 만이다.
순회 포럼은 생명문화 라이프호프(대표 조성돈 교수)와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이사장 황태연), 자살 유가족 전국모임 ‘미고사(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가 유가족들의 일상 회복, 사회적 편견 속에서 겪는 고통 경감을 위해 지난해부터 ‘자살, 말할 수 있는 죽음’을 주제로 마련한 시간이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기(자살 유족들을 위한 대화)’를 주제로 강단에 오른 나 교수는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할 만큼 가까운 관계를 잃었을 때 더 강렬한 애도 반응이 나타난다”며 “애도 반응이 현실의 인정, 관계의 변화, 긍정적 미래에 대한 청사진으로 이어질 때 극복으로의 길을 낸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레지던트 시절 친구를 자살로 떠나보내야 했던 경험을 공유하며 유가족으로서 ‘내가 그의 자살을 왜 막지 못했을까’라고 스스로 자책하지 말기를 당부했다. 이어 “다른 유가족과의 대화, 긍정적 감정을 얻을 수 있는 이벤트 참여, 종교적 모임 등이 애도 후 회복을 돕는 좋은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라이프호프를 중심으로 자살 유가족과 함께 하는 공개 모임은 꾸준히 늘고 있다. 지난해 3차례 진행됐던 순회 포럼은 올해는 서울 수도권을 비롯해 대전 전주 부산까지 5차례 진행된다. 나 교수는 유가족을 위한, 유가족에 의한 모임들이 계속 이어지는 것의 의미에 대해 우리 사회의 자살률 감축은 물론 건강성 회복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유가족들이 자기 아픔을 드러내며 사람들과 소통하는 모습은 개인에게나 사회에게나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함께 걷기(community walk) 밤샘 걷기(overnight walk) 등 미국 자살예방재단(ASFP)이 펼쳐 온 ‘아웃 오브 더 다크니스(out of the darkness)’ 캠페인을 언급했다.
미국 자살예방재단(ASFP) 홈페이지 캡처
“밤새 걷기의 경우엔 참가자들이 어두워질 때부터 걷기 시작해 동이 트는 걸 함께 봅니다. 어둠 속에 있던 이들이 양지로 나아올 수 있도록 돕지요. 주요도시에서만 하던 것이 작은 도시들로 이어지고 있고, 과거엔 당사자와 전문가가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자신의 마음을 나누고 싶은 시민들 누구나 자연스럽게 참여하는 행사로 확장됐습니다.”
스테디셀러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아몬드)의 저자이기도 한 나 교수는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일상 속 ‘생명 지킴이’로서의 역할 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사실 ‘사람 도서관’을 구현한 분은 가장 낮은 곳에서 사랑을 흘려 보내주신 예수님”이라며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이 비단 자살 유가족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과 함께 울어주고 아픔을 나눠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전했다. 나 교수는 강연에 이어 자살 유가족들과 함께 하는 토크 콘서트에도 참여하며 자신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치유와 회복의 길로 용기 있게 나서는 이들을 응원했다.
국내에선 자살예방법 시행령을 통해 지난 12일부터 지자체, 초중고등학교, 사회복지시설 등을 대상으로 연 1회 자살 예방 교육이 의무화됐지만 벌써부터 실효성에 대한 의문 제기되고 있다. 교육 ‘의무 실시’ 기관이었던 사업장이 시행 직전 ‘노력 실시’ 기관으로 변경됐고, 결국 1670만여명이었던 의무 교육 대상자가 780만여명으로 반토막이 났다. 온라인 교육이 허용됨에 따라 실질적 교육 효과 감소 우려도 제기된다.
실제로 자살 예방을 위한 우리 정부의 지원은 여전히 부족한 수준이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지난 1월 발간한 ‘2024년도 예산안 심의 결과’에서 자살예방 관련 사업으로 확정된 예산은 총 603억여원이다. 이는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이 2021년 일본의 자살예방 관련 예산으로 추산한 8300억원의 7.3%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나종호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가 김혜민 자살예방협회 홍보위원장과 함께 자살 유가족의 애도 과정과 인식 개선을 위해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나 교수는 “과거 교통사고 예방을 위해 집행한 예산과 비교해도 자살예방을 위한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며 “한국 사회가 자살과 유가족에 대한 구조적 낙인을 떨쳐 내고 생명을 지키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강연 후에는 미고사 운영진과 자살 유가족들이 무대에 올라 유가족들이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겪고 있는 어려움과 유가족 지원에 대한 법률 제정, 자살 유가족 지원센터 설립의 필요성에 대한 현실적인 목소리를 냈다. 현장에서는 자살 유가족 지원에 대한 법률 제정과 지원 시스템 확보를 위한 서명운동도 진행됐다.
조성돈 대표는 “2년여 전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을 때 자살 유가족들이 ‘직접 나서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으면 좋겠다’고 용기를 내주셔서 순회 포럼을 시작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이어 “지난 20년간 자살률을 40% 가까이 줄인 일본도 그 시작은 유가족을 중심으로 한 국민 청원이었던 만큼 앞으로의 서명 운동이 자살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제도화와 함께 한국 사회의 자살을 줄이는 데 기여해나가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라이프호프는 오는 20일 서울 연세대 대우관에서 나 교수와 함께 다섯 번째 순회 포럼을 개최할 예정이다.
부산=글·사진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